스콧 버거슨은 한국에서 오래 살았고 나름대로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고정관념 따위엔 관심이 없다. 방송에 출연해 재롱떨거나 뻔한 소리만 늘어놓는 책을 펴내는 외국인의 유형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의 ‘영원한 우방’ 미쿡 출신에 나름대로 많이 배운 문화비평가이면서, 어려서부터 히피 문화의 세례를 받은 자유인이자 포스트모더니스트이기도 하다. 그의 관심과 거처는 한국 또는 아시아 어느 한 곳에 국한되지 않으며, 매스미디어의 담론 유통 체계에 대항하는 1인 미디어 Zine의 신봉자이자 발행자이다. 그는 한국 관광 브로셔에 뭐가 나오는지 참고하지 않는다. 한국 아줌마들의 punk함을 발견하고, 도시를 빼곡히 채운 마천루에서 가련한 도시 남자들의 남근 콤플렉스를 읽어내고, 자판기 커피와 사랑에 빠지며, 고궁도 좋지만 종로 뒷골목의 오래된 요정도 사랑한다. 그리고 우주적 접신의 마법사 ‘신바람 이박사’의 최초 발굴자이다. 올~
그의 글이 매력적인 것은, 한국 사회의 기이한 점, 매력적인 점, 불쾌한 점들을 독창적으로 재설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 동의하지 못할 내용이 있기도 하고, 너무 가볍거나 너무 현학적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유쾌하고 신선하다. 저자의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읽는 동안 기본적으로 유머에 대한 감수성을 유지하는 게 좋지만, 그렇다고 책이 농담과 독설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진지하게 문화이론을 펼쳐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부분도 괜찮은 것 같다.
책을 처음 읽었던 2007년 기준으로, 난 그가 한국에 대해 쓴 한국어판 책은 전부 읽었었다. ‘맥시멈 코리아’, ‘발칙한 한국학’에 이어서 '대한민국 사용후기'라는 선정적 제목의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위시리스트를 선점한 수많은 책들을 제치고 바로 구입했다. 유쾌하고 부담없이 통찰력 있는 글을 보고 싶어서였다. 근데 머리글에서부터 유쾌하다기보단 까칠해졌다는 느낌이 확 들더군. 예전엔 이 사람이 저속하고도 놀라운 우리 사회 틈새에서 보석을 발굴하는 걸 즐기고 있다는, (무조건적이진 않지만)기본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한국에 대해 쓰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냥 대놓고 욕을 하면서 신경질 부리고 있더라구. 흠, 어쩌면 혼자 고상한 척하면서 뭔가를 비판하기보단, 덜 위선적이기 위해서, 일부러 자기의 저속함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투덜거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한국에 이리 넌덜머리를 내는 이유는, 한국의 모두가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빠져 끝간데 없이 저속해지고, 바로 그의 모국인 미쿡과 점점 더 비슷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정할 수 없잖아. 씁쓸한 가운데, 내가 변태라서인지는 몰라도 외국인의 '우리나라'에 대한 신랄한 비난에 불편함보다는 후련함이 앞섰다. 전작들과 같은 유쾌함을 유지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스콧 버거슨이 요즘은 뭘 하나 궁금해져서 검색해 봤더니, 2009년에 '더 발칙한 한국학'이라는 책을 다른 저자들과 함께 냈다고 한다. 근데 외국인들이 한국에 살면서 겪은 안좋은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2008년의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비난했다고 한다. 으아니?! 촛불시위 당시에는 그걸 옹호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아마 한국 사회 전반에 넌더리가 난 데다, 군중의 단체 행동에 파시즘 같은 걸 자동적으로 연상하고는 거기에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통찰에 기반한 비판이기보다는 동어반복적인 짜증의 표출인 것 같아서, 아쉽다. 이 사람이 한국에 대한 글을 더 쓸 것 같지도 않지만 쓴다 하더라도 읽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이 책('대한민국 사용후기')의 글들 일부는 괜춘하다능.
* 작은 미국이 되려고 용을 쓰는 한국이 싫었다. …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개판인지를 모른단 말인가? 미국인들이 대통령으로 누구를 뽑았는지 보라. 그것도 두 번씩이나! … 아, 물론 건수만 있으면 반미 시위가 열리고, 인터넷이 가마솥처럼 들끓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소동은 모두 한국이 점점 미국과 비슷해지는 현실을 위장하기 위한 한심한 가면일 뿐이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
* 한국에는 ‘우물 안 개구리’라는 유명한 속담이 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이것이 한국 속담이라고 설명하겠지만, 사실 한국에만 있는 속담이 아니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가에 있는 속담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알 리 없으니, 이곳 사람들이 그것을 한국 속담이라고 알고 있다고 해서 탓할 이유는 없다.
* 왕(황손)의 몸으로 목숨을 걸고 중국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자 했던 의친왕의 정신이 역사의 기억 속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라사랑’이 거의 종교처럼 강조되는 남한 같은 나라에서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의 민족주의는 사랑보다는 질투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적의 위협이 있기 전까지는 사랑의 대상을 그냥 당연히 있는 것으로, 심지어는 완전히 무시하기까지 하는, 역기능적인 동력이라고나 할까.
* 오웰이 민족주의를 주로 ‘경쟁적 위신(competitive prestige)’에 치중하는 것으로 특징짓지만, 파키스탄의 학자 겸 활동가인 에크발 아마드는 민족주의를 ‘차이의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했다.
* 지난 반세기 동안 그러했듯이, 오늘날의 한민족에게는 하나가 아닌 두 개의 국가가 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한민족을 완벽하게 대변할 단일한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심지어는 한민족이 한 번도 진정한 의미의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내세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한민족을 지배했고, 조선 왕조 때는 왕국(royal state)이 양반 엘리트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한민족을 수탈하고 억압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그토록 강력하게 작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한국의 민족주의가 21세기까지도 온전히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천박한 민족주의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함으로써 ‘한국을 또다시 식민지화’하려 하는 일본에 저항한다며, 손가락을 자르고 일본 국기를 불태우는, 서울 일본 대사관 앞에 모인 남한 사람들이다. 천박한 민족주의는 신촌의 술집에 내걸린 “개 또는 일본인 출입금지”라는 간판, 혹은 홍대 앞 지역의 벽과 건물에 그려진 게릴라 화가들의 스텐실 그림 “쪽발이 개새끼(Fuck Jap)”이다. 천박한 민족주의는 오로지 상업적 이익을 위해 상품을 파는 데 독도를 사용하는 한국의 상인들이다. 천박한 민족주의는 ‘역사 왜곡’을 시도하는 일본에 항의하려고 중국의 일본 대사관을 공격하는 중국인 시위대이다. 그들의 교과서는 문화혁명과 대약진운동 때 죽은 수많은 사람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천박한 민족주의는 요즘의 남한과 중국에서 주류를 이루는 듯이 보이며, 천박한 민족주의 다음 단계가 완전한 파시즘이라는 사실은 아주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평범한 남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파시스트 비슷한 광기에 말려들게 하는 한국의 정치인과 언론은 창피한 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국민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의 ‘수탈자(더 많은 신문을 팔기 위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일 뿐이다. 창피한 줄을 알아라.
* 메이어의 접근 방식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민족주의적 관점을 에누리 없이 채택함으로써, 여성들이 과거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초국가적인 가부장적 가치 체제가 자행하는 수탈, 희생, 억압의 희생자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했다는 문제가 있다. 냉소적인 정치인과 그들 수하의 무늬만 지식인들이 국경을 그어놓고 선동하는 추악한 아귀다툼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여성과 노동자와 소수자와 그 밖의 힘없는 사람들이 국경과 지역을 뛰어넘는 연대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목소리와 관점에 주목해야 한다.
* 책을 쓸 때 필자가 스스로 1차적이고 독창적인 조사를 하지 않으면, 책을 쓰면서 의존한 2차 자료의 수준을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다.
* 사실 태권도는 식민지 시대에 한국 사람들이 일본의 가라테를 연구하여, 그 기술을 한국의 전통 무예인 태껸의 기술과 결합시켜 만든 것이다.
*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할리우드에서 남한 배우에게 북한 사람 역할을 맡기면 ‘진짜’가 아니라는 둥, 문화에 대한 ‘모욕’이라는 둥, 온갖 발광을 떨지만, 러시아 출신의 이태원 갈보가 재클린 오나시스 역할을 하거나 존 F. 케네디가 호주 사투리를 써대는 것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
* 적절한 훈련도 받지 않았고, 가르치는 기술도 없이, 오로지 돈을 벌려고 이 땅을 찾은 외국인 영어 선생은 갈보와 다를 바 없다. 둘 다 우연한 출생적 요소로 획득한 속성을 토대로 수입을 얻고(창녀는 육체적 매력으로, 영어 선생은 모국어로), 사랑과는 무관하게 더 많은 돈을 부르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팔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극단적인 비유가 고유한 기술과 직업에 대한 자부심으로 일하는 전문적인 창녀들에게 모욕으로 비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럴 경우 그들은 그냥 갈보가 아니라 ‘섹스노동자’로 적절히 범주화되어야 한다.
* 신물이 날 정도로 ‘한류’를 우려먹으면서도 정작 한류의 본질이라 할 한국의 음악이나 영화에 대한 기사는 쓰지 않는 수많은 한국의 영문 간행물을 접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그 사람들은 한국 문화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한국 문화가 아시아 각지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데 더욱 열을 올린다. 과연 이런 태도를 ‘문화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또 한 번 한류에 대한 기사를 접하면 정말로 토해 버릴 것 같다.
* 마음에 들지 않는 유일한 기사는 유명한 문학 비평가이자,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의 권두 인터뷰다. 그의 말은 새뮤얼 헌팅턴과 롤랑 바르트를 아무렇게나 뒤섞어서 한국과 다른 민족 문화에 대한 터무니없는 본질주의적 일반화를 시도하는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보자. “그밖에 칸트적인 유럽, 홉스적인 미국, 그리고 도교적인 아시아가 있다.” 그래, 멋대로 지껄여라! 설령 그 초등학생 수준의 도식화를 받아들인다 해도, 너무나도 서구화되고 잡종화된 현재의 동아시아에는 그 같은 도식화가 형체도, 의미도 해체되어 버린 지 오래다. … 한국에서 진정한 지성인이 되려면 문화부 장관 자리 같은 데는 눈독을 들이면 안 될 것 같다. 손바닥을 비비는 사람은 많아도, 그따위 터무니없는 일반화가 단순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말이다.
* 한국 땅에는 폰 더치(케네스 하워드)가 히틀러를 사랑했던 폭력적인 백인 우월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나 보다. 니 마빡에 나치 낙인을 찍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모르나? 폰 더치 트럭 모자를 쓴 병신 같은 놈들은 달려오는 트럭 앞으로 기어나가서 얼굴에 스키드 마크나 찍어라. 내 말은, 그런 놈들은 정말로 자기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짜 폰 더치는 아시아 놈들을 싫어할 게 분명하니까.
* 멍청한 인간들이 열정이 없는 이유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의 에너지를 어디에다 어떻게 써야 할지조차 모르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게임만 한다. … 모든 행동에는 결과가 따르는 법이며,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을 존중하면 그 사람도 너를 존중하게 마련이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려면 무엇보다 열정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도 한결 쉬워질 것이다!
* 한국이라는 나라가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갖다버리고 싶어서 안달하며 거의 무조건 세계화, 서구화, 현대화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한국은 아주 극단적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이 끊임없는 위협에 노출되어왔고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되어왔기 때문에 한국인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일종의 부담으로 작용했고, 차라리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그 부담을 극복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나는 지구 반대편에 이식된 가짜 미국 속에 살려고 미국을 탈출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여행과 모험이 아니다.
* 진짜와 가짜 사이에 확연한 선을 긋는 것 자체가 현실을 분류하고 분석하는 방법으로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나?
* 인터넷이 단순히 또 다른 디지털 차원으로 물질세계를 확장한 것일 뿐이라면, 온라인상의 ‘환상’과 오프라인 속의 ‘현실’ 사이에 인위적인 장벽을 만드는 것은 상상력 결핍을 입증하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허구이기도 하다.
* ‘수동성’이나 ‘능동성’ 같은 것은 그 무엇보다도 각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매체 자체의 필연적인, 혹은 내재하는 특징이 아니다.